
칼럼통신 [칼럼니스트]
언론인들 집필 by 서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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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3일
정명(正名)과 ‘바담 풍‘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ynhp 최근 청와대 한 고위관계자가 인사(人事) 관계 기사와 관련하여 해당 기자들에게 “그 논리라면 여러분도 쓰신 기사대로 살아야 하지 않나”라고 했다. 말인즉슨 지당하다. 언행일치가 미흡한 언론계 모순을 잘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강뚜껑으로 물 떠 마신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한 것은 왜일까.
사실 언론만큼 국민의 비난과 지탄을 받는 분야는 드물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일반인의 비난은 옮기기 힘들 정도로 노골적이고 직설적이다. 특히 나 같은 퇴기(퇴직 기자) 앞에서는 의도적으로 대놓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정말 퇴기(퇴물 기생) 같은 기분일 때가 적지 않다.
그때마다 60년대 주한미국원조사절단(USOM) 보고서 등 외국인의 여러 지적이 떠오른다. ‘한국은 뿌리부터 썩은 부패의 나라로 정부 교회 언론 학교 등 모두가 마찬가지다’ ‘한국인들은 태생적으로 부패한가?’라고 하며 그들은 경악했다. 다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절망감을 떨쳐버릴 수 없는 비난이요, 조롱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는 이런 평가들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모두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언론을 비난하는 이들의 뜻을 안다. 언론인은 누구보다도 높은 직업윤리와 도덕성을 갖춰야 하고, 넓고 깊은 역사의식과 사회인식을 지녀야 한다. 이 점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나무라는 것이다. 우리 언론의 이력을 보면 영예보다 오욕이 많았다.
언론인의 언행일치를 요구한 청와대 관계자는 이를 잘 알고 완곡하게 짚은 것이다. 일반인의 막무가내 비난과 달리, 고위층 언급에는 근거가 있으므로 기대를 걸게 하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현 정권이 내 세운 적폐청산 차원에서 함께 풀어나가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언론 정화는 권력의 올바른 언론관이 필수적이다.
제(齊)나라 임금 경공이 정치에 대해서 물으니,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어버이는 어버이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君君, 臣臣, 父父, 子子.<논어 자로편>."고 답했다. 각자 명분과 직무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의 요체라는 정명사상(正名思想)이다. 오늘날로 치면 정치는 정치답고, 언론은 언론답고, 종교는 종교다우며, 교육은 교육답도록 하라는 말이다. 적폐청산은 이를 실현하는 것이다.
사실 적폐청산은 이 정권만 주장하고 나선 게 아니다. ‘구악 일소’ ‘사회 정화’ 등 표현은 다르지만 정권마다 내걸었던 구호였다. 그러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모두 혀 짧은 서당 훈장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바담풍(風) 하더라도, 너는 바담풍(바람풍) 하라’ 했지만 본인이 ‘바람’을 발음하지 못하니 학동들도 끝내 ‘바담’하고 말았다. 적폐청산은 이런 바담풍의 악순환을 끊는데서 완성된다.
-아주경제 2017년 11월7일 |
2017년 11월 13일
슬로우 뉴스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ynhp 조선 숙종 때 이조판서 박태상(朴泰尙)은 “악덕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조급증이며, 여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人之惡德莫甚於躁 千罪萬過皆從此出 )”며 승진에 급급하여 조급하게 서두르는 공직사회 풍조를 비판했다. 남이 서두르면 자신도 추해진 것처럼 꺼렸다. 그가 죽은 뒤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이 묘비명에서 이 점을 칭송했다.
예로부터 ‘欲速不達’(급히 서두르면 도리어 이르지 못한다. 논어) ‘徐進者少患’(차분히 하면 근심이 적다. 신당서)’등 조급증을 경계하는 말이 많았다. 박태상은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데 최선을 다했다.
삶의 속도조절은 특정인이나 특정분야에 한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 필요하다. 지금 세상은 모든 것이 질주한다. 예전 세상은 그래도 자연 속도에 가까웠고, 사람 욕심만 급했다. 그러나 요즘은 모든 물상이 거의 광속도로 내닫고, 사람 마음은 그보다 더 조급하다.
이를 완화하자는 뜻에서 슬로우 푸드, 슬로우 시티 운동이 198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근년에 미국 저널리스트 피터 로퍼가 저서 ‘Slow News’(생각과 사람들 출판사)에서 주창한 슬로우 뉴스 운동도 같은 개념이다.
그는 TV 시청자, 신문 독자 등 뉴스 소비자들에게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기사를 소화하라고 강조한다. 눈길을 끌기위한 흥행성과 무차별 속도경쟁에 휩쓸리지 말고, 천천히 ‘어제 뉴스를 내일 읽는’ 자세로 뉴스를 소비하라는 것이다. 그 지침을 따르자면 상당한 언론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부분도 더러 있는데, 전반적으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각자 수준에 맞춰 뉴스를 소비할 여러 방도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 ‘스포트라이트’(토마스 맥카시 감독)는 그런 점에서 뉴스소비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보스턴글로브가 수년간에 걸쳐 카톨릭 보스턴교구 사제들의 아동성추행을 취재하고 보도한 실화를 영화화한 건데, 왜 뉴스를 천천히 소화해야 하는지 담담하면서도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언론 지식도 상당히 갖출 수 있다.
국내외 정치상황은 물론 각종 사건. 사고 뒷면은 언론의 노력만큼 잘 드러나지 않는다. 보도를 막으려는 관련자들의 저항과 왜곡이 늘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짜뉴스까지 계획적으로 제작, 유포되는 세상이다.
이런 판국에 성급하게 언론기사를 확신하고, 마치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처럼 장담하며 왈가왈부하는 사람을 많이 본다. 거기에 희망사항까지 덧붙여 사실인 것처럼 주장한다. 이는 실속 없는 에너지 낭비로, 자신의 무지와 경솔만 드러내는 꼴이다. 그 손해는 고스란히 뉴스 소비자인 우리들에게 돌아온다.
한 발짝 물러서서 찬찬히 보는 여유가 그래서 필요하다.
-아주경제 2017년 10월31일 |
2017년 11월 09일
헤이즐통신 35 - 아직도 하세요? 우혜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hazelwoo 얼마 전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도 하세요? 하고 물었다. 네 아직도 합니다. 아, 이제 정말 망하는 구나 하면 주문 들어오고, 아 이번엔 정말 망하는구나 하면 또 주문 들어오고 해서 8년째 합니다. 망하면 연락 드릴게요. 이런 대화였다.
지난 8년 동안 헌책방도 서점처럼 문을 많이 닫았다. 그래서 주윗분들은 아직도 하세요 하고 묻는다.
나는 집에서 시작했다. 지금도 집이다.
처음에는 잘돼 하다보면 가게를 내게될지도 모른다는 꿈을 꾸기도 했으나 지난 8년 동안 책 관련 업종은 한국의 시장상태를 반영했다. 큰 기업, 큰 자본이 들어와 자영업자들이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하나 둘씩 사라지는 그런 일들이 쭉 계속되었다.
난 집에서 하니 임대료는 없다.
화장품 가게가 15년 동안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란 현수막을 내걸고 사라졌다. 양복점이 동네 장사를 접었다. 이장 노릇하던 쌀가게도 없어지고 세탁소도 문을 닫았다. 동네 슈퍼 자리에는 편의점이 들어왔다.
차가 있는 사람들은 새로 생긴 대형 마트로 층마다 있는 커피숍과 각종 맛집이 모여있는 푸드홀로 간다.
본보기집을 가보고 갭 투자를 해서 시세차익을 남기느라 책 같은 것, 특히 헌책 같은 것에 는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아직도 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스페인에서 사왔던 무거운 화집을 알아보고 사갔던 사람, 1970년대 발행한 영인본과 이삼십년된 헌책 시집을 사가는 사람들이다. 글쎄, 임대료 없이, 발전 없이 꾹 참고 버틴다면 이들은 헤이즐넷을 찾을 것이다. 어느 대형 서점에서도 못구하는, 어느 화려한 최신식 건물에서도 발견하지 못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하세요? 하던 분이 이렇게 말했다. 계속 수고 좀 해주세요. ㅋ ㅋ
헤이즐넷 예스24 중고서적 http://www.yes24.com/24/usedshop/mall/hazelwoo/main# |
2017년 11월 01일
참된 至公無私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ynhp 춘추시대 晉나라 고급관리 양설적, 양설힐 형제가 죽게 되었다. 이복동생이 반역죄를 저질러 그에 연좌된 것이다.
대부 낙왕부는 평소 양설형제와 가까이 하고 싶었으나 그들이 곁을 주지 않았다. 이 기회를 틈타 동생 힐한테 “사면을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임금 平公은 낙왕부를 총애해 평소 그의 말이면 다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힐이 대꾸도 않자, 낙왕부는 무안해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가문이 멸족할 위기인데 실세의 호의를 물리친 동생을 형은 이해할 수 없었다. 힐이 대답했다. “우리를 살릴 사람은 기해(祁奚)대부 밖에 없습니다.” 형이 반문했다. “기대부는 은퇴해 낙향했고, 낙대부는 늘 임금 곁에 있는데 어느 쪽이 더 유리한가.”
기해는 원수건 자기 아들이건 능력위주로 벼슬에 추천했다. 철저하게 국익 우선이었다. 그래서 ‘기해지천(祁奚之薦)’이 공평무사를 대신하는 말이 되었다. 양설형제를 현직에 추천한 이도 기대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퇴직했다.
동생이 설명했다. “낙대부는 임금이 옳다면 그냥 옳고, 그르다면 무조건 그르다(君可亦可 君否亦否)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우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기대부는 진정으로 지공무사(至公無私)합니다. 그러니 기대부 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습니다.”
소신 없는 사람은 언제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는 법. 힐은 처음부터 낙왕부의 그 점을 꿰뚫고 있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낙왕부는 임금에게 도리어 양설형제를 모함했다. 반면 형제의 처지를 알게 된 기대부는 곧 바로 상경, 나라를 위해서 훌륭한 인재를 살려야 한다고 임금께 간청했다.
형제가 풀려나자 기대부는 그들을 만나보지도 않고 시골로 내려갔다. 힐 역시 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기대부는 그 형제 아닌 나라 장래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형은 그제야 동생의 탁월한 식견에 감탄했다.
동생인들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다. 윗사람 말은 무조건 옳다는 무소신과 냉혹할 만치 공을 우선하는 지공무사의 영향력 차이를 예리하게 읽어낸 것이다.
낙왕부가 진심으로 그 형제를 좋아했다면 기대부처럼 말없이 나서야 했다. 그러나 거절당하자 모함으로 앙갚음하는 소인배 기질을 드러냈다. 예상외로 임금 평공은 총애하는 측근의 모함을 물리치고, 은퇴한 신하의 충심을 받아들이는 현명함을 발휘했다. 임금이 끝내 어리석었으면, 그런 극적 반전 없이 조정에는 거센 피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지공무사다. 관공서나 웬만한 사무실 곳곳에 필수품처럼 걸려있어 누구에게든 매우 가까운 글귀다. 그 말이 좋은 줄을 우리 사회 누구나 안다는 뜻이리라.
-아주경제 2017년 10월19일 |
2017년 07월 15일
이상한 말 - 그 이상한 뒤안길(05): '광우병 소동'-失政이 보검으로 둔갑하는 나라 양평 梁平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yangpy ‘광우병 소동’은 원래 이상할 것이 없는 말이다. 2008년 이명박이 미국을 다녀오면서 광우병 위험성이 있는 쇠고기 수입을 허용함으로써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 사건이다. 하지만 그 뒤 광우병에 걸린 사람이 나오지 않자 ‘광우병 소동’은 ‘진보세력들이 근거 없이 일으키는 소동’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그래서 ‘광우병 소동’은 역사적 사건을 뜻하는 고유명사와 진보세력의 한 ‘속성’을 지칭하는 추상명사의 두 가지 뜻으로 통용되고 있다.
다만 중도파나 진보세력은 ‘광우병 소동’이 아니라 ‘광우병 시위’나 ‘광우병 사태’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반면 수구세력은 ‘광우병 소동’을 더욱 비하해 ‘광우병 난동’이라고도 부른다. 아무튼 광우병 시위 당시에는 쩔쩔매던 이명박 정부를 비롯한 보수 세력이 갈수록 광우병 소동을 보검 같은 무기로 사용하고 있어 어쩌면 국어사전에도 올려야 할 판이다. 박근혜도 그의 탄핵 국면에서 정규재TV와 가진 인터뷰에서 최순실 사태를 변명하면서 그것이 광우병 소동처럼 근거가 약한 것이라고 써먹었다.
‘광우병 난동’은 박근혜를 옹호하는 태극기집회에 엄청난 활력을 제공하기도 했다. 거기서 촛불집회는 ‘광우병난동’과 동렬의 터무니없는 선동으로 매도됐다. 이제 탄핵국면은 끝났으나 ‘狂牛病 소동’은 ‘狂愚病 소동’ 같은 것으로 낙인찍힌 채 진보세력의 주장을 공박하는 주무기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을 살펴보면 수구세력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광우병 난동’은 참으로 우스운 무기다. 마치 수수깡으로 만든 칼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더욱 두렵다. 그런 장난감 같은 칼이 보도처럼 쓰일 수 있다는 것은 한국이 논리가 먹히지 않는 풍토임을 반증해서다.
광우병 시위를 비난하는 근거는 초등학생들도 판별할 수 있는 문법상의 오류에 바탕하고 있다. 그것은 ‘광우병이 일어날 수도 있는 쇠고기’를 수입하겠다고 해서 일어난 것이지 ‘광우병을 (반드시) 일으키는 쇠고기’를 수입키로 했다고 해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광우병으로 인한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해서 시위의 정당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중환자들이 있는 병원의 야간 당직의사가 밤중에 친구와 술을 마시느라 자리를 비웠다 해서 반드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사실이 적발되면 그 의사는 문책을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그 의사가 ”아니,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잘못된 환자라도 있었단 말이냐?“고 되레 공박을 하면 어찌될까.
그것은 전방의 초소에서 2인 1조로 경계를 서던 두 초병이 마을로 내려와 술을 마시고 올라간 것이 적발됐을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사이에 어떤 사고가 났는가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은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광우병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광우병시위를 공박하는 것은 그런 의사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을 매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당시는 세계의 어느 고명한 의학자도 위험부위의 쇠고기를 먹을 경우 광우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보장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따라서 국민이 대통령에게 바라는 것은 편작이나 화타 같은 명의의 의술이 있거나 미래를 환히 내려다 볼 수 있는 메시아의 예언력을 갖추라는 것이 아니었다. 위험의 소지가 있는 문제를 조심스럽게 대처하는 성실성만 보이면 국민은 만족이었다. 광우병의 경우 일본이나 다른 선진국의 위정자들처럼 겁먹은 듯 조심스럽게 나아가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 간 이명박이 갑자기 천재적 명의가 됐던지 아니면 예언자가 됐는지 그 때까지 금수대상인 30개월 미만의 소의 뼈를 수입해도 된다는 식의 주장을 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미국이 동물사료 금지조치만 취하면 30개월 이상의 쇠고기도 수입하기로 합의를 해버렸다. 더욱 기막힌 것은 미국에서 광우병 사태가 발생해도 즉각 수입금지 조치를 취할 수도 없도록 한 것이다. 그쯤 되면 그가 한국 대통령인지 미국 축산협회회장인지 구분이 어려울 판이었다. 광우병이라는 의학적 문제를 떠나 당시 이명박이 보여준 일련의 태도도 국민을 실망시키거나 격분시키기에 족했다. 우선 문제의 캠프데이비드에서 그가 부시와 함께 탄 차를 운전한 것도 썩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의문을 자아내는 행동이었다. 그 때까지 캠프데이비드를 찾은 수많은 국가원수들은 그런 식으로 미국과 친교를 증진할 수 있는 ‘비법’을 몰라서 쓰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것이 국가원수로써의 격에 맞지 않는 일이어서일까.
그래도 정녕 국가원수가 운전을 해야 한다면 주인(부시)이 손님(이명박)을 위해서 하는 것이 정도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정도는 약과였다. 그가 귀국 후 광우병 사태가 일어나자 ”나는 미국을 믿는다“고 한 말은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열광적인 기독교도’로 알려진 이명박은 또한 독실한 ‘미국교’의 신자란 말인가. 아무튼 이명박의 ‘믿음’은 번 번히 국민을 놀라게 했다.
그는 서울시장 시절 서울기독청년들의 모임에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이며 서울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서울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고 기도하는 서울기독청년들의 마음과 정성을 담아서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 합니다“고 함으로써 물의를 일으켰다.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도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모른다. 그저 어렴풋이 서울을 닭장차처럼 하늘나라까지 끌어 올려 하느님께 봉헌하면 죄 많은 나도 서울시민이기에 천당까지 무임승차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스치는 정도였다.
그러나 서울시민 가운데는 불교신자도 있고 그 가운데는 부부의 한쪽이 먼저 극락에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배우자가 천당으로 가게 되면 이산가족이 되는데도 그에 대한 ‘후속조치’를 발표하지 않은 것도 문제일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런 사고는 없었기에 이명박은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대통령이 공석에서 미국을 믿는다고 발설하는 것은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그것이 국가 원수가 할 말인가.
미국을 믿는다면 마피아도 마약밀매상도 그리고 축산업자도 믿는다는 말인가. 그 말에 답하듯 2012년 미국서 광우병 환자가 또 발생해 적어도 미국의 축산업자는 믿을 수없게 됐다. 당시 대선을 앞둔 박근혜도 검역중단을 주장해 파란이 일기도 했다.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 같은 이명박의 모습을 색다른 각도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의 대선 과정에서 말썽 많았던 BBK사건 수사에 미국 사법 당국도 관여했다는 점에서다. 아무튼 광우병 사건은 주권을 지키려는 국민들로써는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광우병 환자가 나오지 않자 거꾸로 광우병 시위를 몰아붙이는 수구세력의 논리부재는 한편으로는 우스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섭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무식은 힘이다“는 구절이 떠올라서다. 갑자기 소설 속의 나라 ‘오세아니아’에서 그런 국시에 길들여진 주민들이 튀어나오는 듯 하는 기분이 들어서다. 그것은 광우병 소동을 둘러싼 논란을 떠나서도 우리 사회에서 자주 비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광주 사태가 북한군의 개입으로 발생했다는 주장도 그렇다. 5.18기념재단이 최근 조사한 결과 성인의 11.9% 그렇게 믿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11.9% -. 그것은 작은 수치다. 그런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나라를 좌우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숫자는 너무 크다.
아직 목격자들이 많이 살아 있어 너무도 생생한 역사적 사실이 왜곡돼 우리 국민들 가운데 400만 이상의 인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것은 ”무식은 힘이다“는 표어만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집요하게 퍼뜨리는 세력의 존재를 확인케 한다. 문제는 그런 그릇된 인식이 어느 지역이나 어느 계층 사이에는 11.9%를 훨씬 뛰어넘어 ‘대세’를 이루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분열상을 반영한 그 현상은 자칫 ‘국어’의 분열로 떠오르는 느낌이다. 남북한이 오랜 분단 끝에 ‘국어’가 달라지듯이…
-2017.07.13 작성
* 양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한국일보 문화부 차장(한국일보 견습 25기)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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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7월 15일
마유미와 이유미…그 다음은 ‘?유미’ 양평 梁平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yangpy 국민의당 당원 이유미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다.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그런 사건이 나면 나는 곤혹스러워진다. 그 사건들이 너무 비루하고 가증스러워서는 아니다. 대선과 관련된 일이라면 세상이 큰 일 난 것처럼 떠들썩함에도 나 자신은 왠지 놀랍지 않아서 곤혹스러운 것이다.
그러다보니 “내가 어떤 중대한 진실을 못보고 있어서 그처럼 놀랍지 않은 것 아닌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내가 저승에 갈 날이 너무 가까워 놀라움이라는 반사 신경도 마비된 것 아닌가?”하는 불안감도 한 몫 하는 듯하다.
그럴 때는 엉뚱하게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라 브뤼에르의 “인생이란 느끼는 자에게는 비극이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희극이다”는 말을 떠올리며 자위하기도 한다. 물론 ‘인생’과 ‘정치현상’은 다른 말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그것 아닌가.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내고 사는 인생이니 정치가 곧 인생이고 따라서 정치도 생각을 하면 희극이 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한국의 정치 문제는 아무리 정색을 하고 생각을 해봤자 비극도 아니고 희극도 아닌 것으로 다가온다. 마치 아파트 정문 앞의 눈에 익은 쓰레기통을 볼 때 분노도 희열도 느끼지 않듯 무덤덤한 잿빛의 무관심이 엄습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유미 사건은 눈길을 끄는 점이 한 가지 있다. 바로 그 ‘유미’라는 이름이다. 그 이름이 1987년의 KAL기 사건의 범인 ‘마유미’라는 이름을 떠올려서다.물론 마유미는 이유미 식으로 성이 ‘마’씨고 이름이 ‘유미’였던 것은 아니다. 본명이 김현희(金賢姬)였던 이 북한 특수요원은 KAL기 폭파라는 특수임무를 위해 하치야 마유미(蜂谷眞由美)라는 일본식 가명을 사용했을 뿐이다.그럼에도 당시 매스컴은 ‘마유미’로만 부르다시피 해 ‘하치야’라는 성을 아는 이가 드물 정도였다.
이름 가운데 ‘유미’라는 두 글자 외에는 나이도 출신도 그리고 화제의 인물이 된 배경도 전혀 딴판인 두 여성의 일이 왜 눈길을 끌까. 둘 다 대선과 관련이 있어서다. 이유미가 대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아예 말할 것도 없는 일. 그러나 북한 공작원 마유미는 대선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그는 사건 당시 아마 ‘대통령’이나 ‘대선’이라는 말도 생소했을 것 같다.그럼에도 마유미가 1987년 12월16일의 대선을 하루 앞두고 처음으로 모습을 보일 때의 모습은 국민 모두의 머리에 각인돼 있다. 혀를 깨물어 자살을 할 가능성이 있다며 입에다 ‘재갈’ 같은 것을 물린 채 그는 나타났던 것이다.
사람이 혀를 깨물어 자살 할 수 없다는 것을 전문가들은 잘 안다.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전문가들이 ‘겸손하게도’ “혀를 깨물어죽는다”는 속설에 따라 줌으로써 마유미는 재갈이 물리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아마 별 것을 가지고 다 귀찮게 하니 앞으로 취조과정에서 고생문이 훤하게 됐다고 치를 떨었을 지도 모른다.
그것만이 아니다. 마유미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던 바레인에서 조사가 끝나야 한다며 그를 놔주지 않자 그를 대선 전날까지 입국시키기 위해 거국적인 수단이 총동원된 것은 나름대로 잘 알려진 일이다. 아무튼 그런 노력으로 마유미는 본의 아니게 기득권 세력이 그처럼 갈구하던 ‘북풍의 여신’으로 나타났으니 그들에게는 얼굴도 아름다운 그가 ‘미의 여신’으로도 비쳤을 것이다. 자신이 이룩한 그 ‘위대한 공적’을 까맣게 몰랐을 마유미는 대선의 멋진 ‘소도구’였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일은 물론 그 ‘죄악성’까지 알고도 나선 이유미와는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이유미도 대선의 소도구 같이 비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한국에서 대선이, 아니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갖는 절대성 때문일 것이다.그 엄청난 절대성으로 대선과정에서의 어지간한 부정은 철지난 대선 벽보처럼 하찮은 것이 되고 만다. 그런 속에서 ‘소도구’ 같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공을 세우려 무리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사건들은 중국의 오랜 황권 다툼의 역사에서 있었던 “이기면 관군(官軍), 지면 적군(賊軍)”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중국 역사상의 수많은 격변에서 ‘정의’는 따로 없었다. 이기면 정의인 것이다.
중국의 수양대군 격인 명나라의 영락제가 황제인 조카에게 반란을 일으켜 성공에 이르렀던 과정이 좋은 예다. 주원장의 넷째 아들(본명 朱체)로 베이징 부근을 다스리던 연왕이었던 그는 조카인 건문제를 치러 당시의 수도인 난징으로 진격했다.그 과정에서 주체가 거쳐 지나가야 했던 수많은 제후들의 관심은 건문제와 주체의 어느 쪽이 옳으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이길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공식이 통용돼왔다.1979년의 12.12사태라는 쿠데타 상황에서 ‘적군(賊軍)’으로 분류돼야 할 쿠데타 참가자들은 그 뒤 ‘개국공신’으로 영화를 누린 반면 쿠데타에 저항한 참된 군인들은 죽거나 부상당하지 않으면 ‘적군’ 신세가 돼 감옥에 가야했다. 따지고 보면 ‘혁명’으로 포장된 5.16쿠데타 상황에서도 그 비슷한 일들은 일일이 거론할 수도 없이 일어났다.
그런 관점에서 이유미 사건을 보다 샅샅이 살펴보면 그 사건은 얼핏 보기처럼 간단치 않고 따라서 싱겁지도 않다.만일 이유미의 ‘폭로’작전의 영향으로 문재인이 아슬아슬하게 낙선했으면 그 사건의 귀결은 어찌됐을까.우선 그 조작사건 자체가 이번처럼 쉬이 알려질 수 있을까도 의문스럽고 알려져도 그 사건이 제대로 처리될 수 있을지는 더욱 의문이다.
여기에다 그로 인한 승자가 이유미가 바랬던 대로 국민의당의 안철수가 되느냐, 아니면 이번 대선에서 2등을 한 홍준표가 되느냐를 가상해보면 그 답은 커다란 블랙홀같은 고차방정식으로 빨려들어 가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 답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도 세상의 모습은 내다보인다. 지금까지 수많은 대선이 있었고 그 때마다 부정 시비가 없었던 경우는 드물다.그러나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식으로 부정선거라는 소리는 있어도 청와대에는 들리지 않아 대통령은 임기를 마쳤다.
박근혜도 국정원 댓글 사건 등으로 물러난 것은 아니다.그가 물러나기 오래 전에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을 파헤치려던 특별수사팀장이 좌천당한 것으로 그 사건은 매듭이 지어졌다.그 뒤 정권이 바뀌어 그가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임명되자 언론들은 “사필귀정!”이라면서 마치 드골 장군이 파리에 개선한 것처럼 찬사를 보냈지만 씁쓸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미국의 1972년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당선됐으나 대선과정에서 공화당 당원들이 민주당 시설에 도청장치를 하려다 들통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권좌를 물러나야 했던 것이 기억나서다.정당의 당원들이 당을 위해 그릇된 충성을 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친 사건으로도 당선된 대통령이 물러난 것이다. 만일 미국의 국정원에 해당하는 CIA나 FBI가 그런 사건에 개입됐다면 미국의 풍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아마 남북전쟁이 일어난 것처럼 난리가 나거나 적어도 링컨이나 케네디가 암살당한 사건처럼 나라가 들썩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약 30년 전 마유미에게 재갈 쇼를 부린 정보기관이 댓글 쇼를 부려도 대통령은 ‘관군 총수’로 건재했다. 그런 마당에서 보면 마유미나 그 30년 뒤의 이유미나 흔히 보는 ‘대선 소도구’들일 뿐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기보다는 차라리 쓰레기처리장에서 장미가 피기를 바라라”는 식으로 말하자면 둘 다 쓰레기 장미 밭에서 자라라는 장미 대신에 솟아나온 잡초 정도로 보면 될 일이다.
이유미 사건이 적발돼 당사자들이 처벌됨으로써 이제 그런 사건은 영원히 자취를 감추게 될까. 그래서 우리 대선의 역사가 쓰레기더미에서 벗어나 장미 넝쿨 속을 달리게 될까. 왠지 고개가 흔들린다. 우리나라에 성씨가 워낙 많은 데다 ‘유미’라는 이름도 흔해서 또 무슨 ‘유미’가 나올지 몰라서다.
또 한 가지 회의는 그 모든 것은 국민의 수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5년만에 국민수준이 환골탈태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그래서 대선과 관련된 시비를 보면 마음속에는 잿빛의 무관심이 자리 잡는다.
2017.07.07 작성
* 양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한국일보 문화부 차장(한국일보 견습 25기)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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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6월 20일
이상한 말 - 그 이상한 뒤안길(04): '보리고개를 없앤 사람'- 半人半神 신화의 기원 양평 梁平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yangpy ‘보리고개를 없앤 사람’이라는 말은 이상할 것이 없는 말이다. 그것이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지도 명확하다.
굳이 시비꺼리를 찾자면 맨 끝의 ‘사람’이라는 말 정도다. 그 주인공이 바로 ‘반인반신’인 박정희여서다.
요즘 그의 ‘100주년 탄신제’라 해서 기념우표를 발행한다는 등 열을 올리고 있는 이들의 눈에는 특히 그렇다. 성인이나 임금이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탄신제의 주인공을 ‘사람’이라고 묘사한 것이 얼마나 불경한 일인가.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도 이 말을 곰씹어보면 수긍할 수 없는 대목들이 너무 많다.
나는 보리고개를 없앤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선 “왜 ‘천연두를 없앤 사람’이라는 말은 없을까?”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지난날 우리 역사에서 보리 고개도 무서웠지만 천연두도 그에 못지않았던 것이다.
보리 고개를 넘어가지 못해 죽은 이들과 ‘손님’으로 찾아온 '마마'가 저세상으로 데려간 사람은 어느 쪽이 더 많을까?
그건 알 길이 없으나 “호랑이나 오랑캐보다 무섭다”던 천연두는 지난날 무서움의 대명사였다.
천연두가 무서웠던 것은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다. 신대륙 발견 이래 남미의 원주민들이 급감한 것도 백인들의 총알보다 무서운 천연두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천연두는 보리 고개처럼 하층민에게만 두려운 것도 아니었다. 청나라의 첫 황제인 순치제(順治帝)도 천연두로 일찍 죽었다.
그래서 순치제의 생모인 효장(孝莊)태후가 비슷한 또래의 손자들 가운데 이미 천연두에 걸렸다가 살아남은 현엽(玄燁)을 점찍어 강희제로 등극시켰다. 따라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은 아마도 ‘곰보’였을 가능성이 많다.
하지만 천연두가 극심하던 그 시절에는 마마자국이 오히려 자랑이 되기도 했으니 서양에서 결투가 심하던 시절 얼굴의 흉터 같은 셈이다.
그렇게 무서운 천연두였으나 어느덧 마마자국의 얼굴들이 사라지더니 아예 세계의 질병 족보에서도 사라졌다.
그러나 ‘천연두를 없앤 사람’이라는 반인반신은 없다.
그것은 천연두를 없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다. 1796년 우두를 발명한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에 처음 칼을 휘둘렀으나 그것은 고래의 몸에 창을 하나 꽂은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로부터 한 세기쯤 지나 지석영(池錫永)이 종두법을 도입한 것도 한국의 천연두라는 고래에 창을 하나 꽂은 셈이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지난 뒤에 태어난 나의 눈에도 많은 ‘곰보’들이 비쳤다.
한마디로 제너나 지석영 같은 위인들을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천연두는 사라진 것이다.
굳이 보리 고개를 없앤 사람의 논리를 따르자면 고종으로부터 시작해 일본 총독들을 거쳐 이승만까지 이어지는 위정자들을 나열해야 할 판이다.
천연두와 달리 보리 고개는 어느 영웅적 지도자의 영도력만으로 없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다. 보리 고개도 보이지 않는 무수한 사람들의 기술과 노력으로 사라진 것이다.
예를 들어 보리 고개를 없애려면 하늘의 처분만 바라는 천수답(天水畓)에 저수지의 물을 대주어야 하니 저수지 건설부터 시작해야 한다. 거기엔 동양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시멘트를 이용한 토목공사 기술을 오래 연마해온 서양 기술자들의 노력이 잠재해 있다.
따라서 제너의 의술처럼 서양의 토목공사 기술을 익힌 우리 기술자들의 없이는 보리 고개가 낮아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농업상의 기술을 떠나 보리 고개를 없애는 데 크게 기여한 우리 공업기술도 그렇다. 그것은 박정희와 무관하게 이어온 한국인 특유의 학구열이 이룩한 것이다.
1950년대만 해도 대학들은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비웃음을 받지 않았던가. 여기엔 시골서 소를 팔아 대학을 보내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절망감이 깔려 있었다.
예를 들면 한 고을에 공장이라고는 고작 연탄 공장이나 성냥 공장 정도밖에 없던 시절에 공과대학을 나오면 무슨 소용이냐는 식이었다.
은행들이 1년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행원만 모집하고 무역회사 같은 것은 거의 없는 처지에 상과대학을 나와도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맞은 1960년대는 한국의 경우 쿠데타가 일어난 불운의 시기였으나 동아시아 경제를 위해서는 행운의 시기였다.
일본이 2차 대전의 패배로부터 15년이 지나 기지개를 켠데다 마침 베트남 전쟁이라는 호기를 맞아 경제가 도약기에 접어들었다. 그 호기는 그들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이웃나라들이 동참하게 마련이었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학력수준을 자랑하는 한국과 타이완이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골탑이라는 말을 들어가며 허리띠를 졸라맨 채 자녀들을 대학에 보낸 촌부들이야 말로 산업의 역군들을 길러낸 주역들인 셈이다.
역사를 통해 갑질의 횡포를 가장 많아 겪었기에 밟혀 죽지 않기 위해서 기를 쓰고 공부를 시켰던 두 나라의 그 어두웠던 역사가 의외로 빛을 보았다고도 할 수 있다.
다행이었던 것은 한국이나 타이완과 마찬가지로 학력수준이 높은데다 천문학적 규모의 노동자 군단을 거느린 중국이 아직 개방되지 않은 점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60-70년대의 경제성장을 주도한 것은 부패한 구한말의 위정자들에서 자유당 통치자들까지도 모두 한 축에 끼어야 할 일이었다.
‘보리 고개’의 신화에 내포된 또 하나의 허점은 바로 똑 같은 기아를 경험한 인접국들의 경우를 살피지 않은 점이다.
중국의 경우 보리 고개라는 말은 없다. 양쯔 강 이남과 이북의 기후대가 달라 농업이 아예 딴판이어서다.
그러나 중국에 보리 고개 같은 기아가 없었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아니, 중국의 기아는 한국의 그것을 능가하는 면이 있다.
예를 들어 황하 유역의 중원평야는 한반도 몇 배의 넓이에다 땅이 기름져 거름이 없어도 소출이 좋은 천혜의 땅이지만 대륙성 기후의 심술을 당하면 몇 년이고 비가 오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펄 벅의 ‘대지’에서도 그런 기아 상황에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오지 않던가.
중국의 기아가 한국의 그것보다 더 심했다고 추정하는 한 근거로는 중국의 역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식인문화를 들 수 있다.
‘수호지’에서 사람고기로 만두를 빚는 이야기는 소설적인 과장으로만 볼 수는 없다. 중국의 식인문화가 여러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은 중국인들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
물론 식인문화가 반드시 기아에서 비롯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한나라 초기 유방이 공신인 팽월을 죽여 그 고기로 젖을 담아 중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국지에서 동탁이 장온을 죽여 쟁반 위에 올려놓고 대신들에게 보여주었다거나 그 고기로 국을 끓여 중신들에게 맛보게 했다는 버전들도 있다.
그런 이야기는 기아와는 상관없는 공포정치의 일환이지만 그 배경에는 식인문화의 전통이 깔려 있고 그 뒤에는 아사의 토양이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굶어 죽은 가족을 성 밖에 내다 놓고 이튿날 묻으러 갔더니 밤사이에 주민들이 시신의 살을 모두 발라 먹어 뼈만 남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중국에서도 이제 아사자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현대중국사에서 ‘국부(쑨원)’나 ‘혁명의 영웅(마오쩌둥)’은 있어도 ‘아사를 없앤 영웅 ’이라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역사의 발전을 긴 안목에서 본데서 오는 것이라면 긍정적이다.
이를테면 프랑스 혁명은 루이 16세의 대처방식이 미흡한 면도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고 “짐이 국가다”고 큰소리 쳤던 태양왕 루이 14세가 씨앗을 뿌렸다는 시각이다.
물론 그런 사고에는 상당한 역사적 소양이 필요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보리 고개의 신화에 비친 한국인의 사고는 너무 단기간의 현상에 머문다.
그래선지 한국의 위정자들도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외면한 채 당대에 업적을 세우려 부심하는 꼴이다.
한국의 경우 일본의 세이칸 터널 같은 굴지의 사업이 불가능할 것만 같다. 일본의 혼슈와 홋카이도를 연결하는 이 터널은 1961년에 착공해 1988년 준공되기 까지 27년에 걸쳐 수많은 총리들이 릴레이식으로 공사를 떠맡아 대미를 장식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것이 가능할까. 따지고 보면 이명박이 내세웠던 한반도 운하나 그가 결행한 4대강 사업도 장기간에 걸쳐 후대 대통령들이 릴레이식으로 참가하는 게 정상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사업에 참가한 업체들이 이명박의 고교 동문 사업자들이라는 등 온갖 찜찜한 이해관계가 얽혀있어 후대에 넘기기에 껄끄러운 면이 있어서다..
그것은 비리와 관련된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문제에서도 우리나라는 당대에 해치우려는 관행이 뿌리박혀 있다.
김영삼의 조선총독부 철거가 그 대표적이다.
지난날 조선총독부 건물이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을 철거해야 하느냐는 데는 반론도 많았으나 그런 문제는 따지고 싶지 않다.
다만 국립중앙박물관을 새로 만든 뒤에 철거하는 것이 순리였음을 지적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쑥 건물을 철거한 바람에 국립중앙박물관은 콘세트 같은 데서 셋방살이를 해야 했다.
하지만 김영삼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없앤 대통령’으로 마치 고난의 투쟁을 겪은 민족지도자처럼 미화되고 있다.
내 눈에 그것은 ‘보리 고개’의 신화처럼 허황한 ‘조선총독부’신화와 다를 바 없다.
김영삼이 그런 명성을 얻으려고 국립중앙박물관에 ‘피난살이’를 시킨 것이야 말로 그가 내세운 민족정기와는 배치된다. 어찌 한 나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중앙박물관을 ‘이유 없이’ 피난살이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장제스(蔣介石)가 대륙을 잃고 타이완으로 쫓겨나는 와중에도 문화재를 챙겨와 고궁박물관을 세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용인하다시피 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심기도 헤아렸을까.
그런 문화재의 운송사업을 게릴라식으로 저지하는 것은 홍군의 전공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문화재에 손상이 갈까봐 마오쩌둥이 일체 손을 쓰지 않은 것은 공적도 많고 과실도 많은 그의 공칠과삼(功七過三)에서 눈에 띄지 않는 공적인 셈이다.
그러나 취임직후 궁정동 안가를 철거해 박수를 받은 김영삼은 이듬해 외인아파트를 폭파하더니 그 여세를 몰아 대선 공약에도 없던 조선총독부 철거를 강행한다. 다시 말해 평소에 별로 관심 없었던 일제 잔재에서 갑자기 ‘민족적 영웅’의 발판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을 발표하면서 서둘러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를 강행한 것이다. 순리대로 2005년 새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 된 뒤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다면 노무현이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것으로 기록될 판이어서 그런 편법을 썼다고 밖에는 해석될 수 없는 일이었다.
앞서 한국에서는 여러 위정자들이 대를 이어서 하는 사업이 힘들다고 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의 해체와 신축은 그런 경우에 해당한 셈이다. 그러나 모처럼 그런 계기를 맞자 김영삼이 서둘러 그 사업의 ‘앙꼬’를 먹어버린 셈이다.
그것은 김영삼을 비판하기 전에 한국인들의 허약한 ‘시력’을 탓해야 할지도 모른다. 보리 고개를 없앤 사람이라는 허상을 떠받드는 그 졸렬한 시력을…
2017.06.19 작성
* 양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한국일보 문화부 차장(한국일보 견습 25기)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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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5월 17일
이상한 말 - 그 이상한 뒤안길(03): ‘血盟’- ‘종교’의 경지에 이른 짝사랑 외교 양평 梁平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yangpy ‘태극기 집회’를 보는 느낌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부끄러움’이다. 국기를 내세울 상황이 전혀 아닌 국내 문제에서 국기를 내세운 집단이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기 이전에 우리 국민들이어서다. 국기를 내세우는 것은 통상 대외적인 상황에서다. 전쟁이나 국제스포츠 경기처럼 외국과 대결하는 경우에 주로 등장하고 국제적인 친선모임에서도 쓰인다.
미국 국가도 1814년 미국과 영국이 전쟁을 하던 상황에서 영국군의 포격을 받고도 꿋꿋하게 휘날리는 맥헨리 요새의 성조기를 보고 법률가이자 시인인 프랜시스 스콧 키가 작사한 것이다. 그 성조기가 미국의 국내 대결에서도 쓰인 적은 있다. 남북전쟁 당시 북군이 이를 휘둘렀던 것이다. 다만 그 때는 남부연합이 성조기를 인정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남부연합기를 제정해 휘둘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 미국에는 일시적으로 두 나라가 생겨 제각각 자기네 ‘국기’를 휘두른 셈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탄핵 문제가 제기됐을 때 탄핵 찬반의 어느 쪽도 성조기를 휘두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근혜 탄핵이라는 순수한 국내정치 문제에 태극기가 동원됐으니 망연자실할 일이었다. 그것은 월드컵 같은 국제경기가 아니라 전국체전에 태극기가 동원된 것만 같다. 그렇다면 박근혜 탄핵을 주장한 사람들이 남북전쟁 당시의 남부연합군 같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세력이어서 일까. 태극기 집회측은 촛불집회가 ‘종북 좌파’의 소행이라고 하지만 그런 말을 믿는 이는 거의 없다.
아무리 수구적 논조를 자랑하는 언론들도 이들 ‘종북 좌파’들이 태극기를 부정하고 남부연합기 같은 별도의 국기를 제정하려 한다고까지는 주장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순수한 태극기 집회라면 망신이라도 집안 망신이니 크게 부끄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부끄러운 진짜 이유는 ‘태극기 집회’가 아니라 ‘성조기 집회’여서다. 이렇게 말하면 태극기 집회에 성조기가 좀 끼었기로서니 그것으로 ‘성조기 집회’랄 수 있느냐는 항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수학적 비례가 통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쌀밥에 모래가 1% 만 섞여 있어도 그것은 쌀밥이 아니라 ‘모래 밥’으로 불리거나 아예 ‘밥’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밥에 도저히 끼어서는 안 되는 모래처럼 한미친선모임이 아닌 태극기 집회에 성조기가 끼어든 자체가 황당하다.
어떤 태극기 집회에서는 테니스코트처럼 널찍한 성조기를 수십 명이 붙들고 가고 그 주변에 자그마한 태극기가 들러리서듯이 나부끼기도 했다. 그것은 얼핏 미국의 ‘51번째 주’의 어떤 행사에서 연방기(성조기)와 ‘州旗’가 함께 어울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집안 망신’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미국인을 비롯한 모든 외국인의 눈에 그것은 어떻게 비쳤을까.
새삼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발끈해온 우리의 모습이 우스워졌다.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이 성조기를 들고 나온 이유는 너무 어지럽지만 그런 것을 다 챙기고 싶지는 않다. 나는 태극기 집회가 끝난 뒤 찌부러진 태극기 쓰레기들처럼 어지럽게 널린 그 많은 말 가운데 ‘혈맹’이라는 말에 새삼 눈길이 끌렸을 뿐이다.
‘혈맹’-. 그 말은 실은 ‘성조기 집회’ 이전부터 나의 뇌리에 복잡한 파문을 일으켜 왔다. 우선 ‘혈맹’이라는 말뜻이 혼란스러워서였다. 굳이 한영사전 같은 것을 들추면 ‘혈맹’이 ‘blood alliance’라고 나오나 과문한 탓인지 영문에서 그런 말이 실제로 쓰이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혈맹’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 상황은 더욱 한심하다. 이론상 ‘혈맹’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16개국을 부르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막상 ‘태극기 집회’, 아니 ‘성조기 집회’에 참가한 이들에게 ‘혈맹’이 누구를 지칭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미국’이라고만 할 것 같다. 다시 말해 '혈맹'은 미국의 별칭이 돼 있다.
하지만 보다 큰 문제는 미국인들에게 “당신들의 ‘혈맹’은 어느 나라냐?”고 물으면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틀림없이 어리둥절해 할 것만 같다. 우선 ‘혈맹’이라는 말이 낯설어 그렇고 그 뜻을 알고 난 뒤에는 그들의 무수한 ‘혈맹’ 가운데 어느 나라를 내세울지 막연해서다.
20세기 이래 세계의 큰 분쟁 가운데 미국과 관계없는 분쟁이 거의 없었으니 미국의 혈맹들은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한국 동포나 기타 한국과 특수한 관계에 있지 않는 미국인이 한국을 ‘혈맹’이라고 내세울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혈맹’이라는 말이 통용되건 않건 미국이 그 말의 의미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미국 역사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어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차 대전에서 미국의 가장 큰 혈맹을 꼽는다면 독일군에게 가장 많은 국민이 희생당한 소련일 것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완전히 종결되기도 전에 소련이라는 최대의 혈맹은 ‘잠재적 주적(主敵)‘이 되고 태평양전쟁의 주적이었던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소련 등 공산세력을 막는 보루가 됐다. 한마디로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냉엄한 국제 정치의 진리 앞에 혈맹은 빛바랜 췌사일 뿐이다.
우리와 처지가 가장 가깝고 관계도 얽혔던 남부 베트남을 보자. 그들의 패망이 돌이킬 수 없게 되자 미국은 수상쩍은 파리평화협정을 남부베트남 정부에 강요하다시피 한 뒤 철군했다. 말이 평화협정이지 그것은 호랑이꼬리를 베트남의 ’혈맹‘에게 쥐어주고 줄행랑친 것이었다. 그래서 곧 패망한 이 ’혈맹‘을 위해 미국이 한 일은 보트피플들을 좀 후하게 받아준 정도였다.
베트남인들을 위해 한 가지 다행한 것은 그들이 무식해서인지 무심해서인지 ’혈맹‘이라는 말을 몰랐거나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배신감이 적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는 그들이 우리보다 한걸음 앞선 느낌이다. 하지만 혈맹이란 말을 모르거나 아는 것 자체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성조기 집회처럼 ’혈맹‘을 내세워 타국 국기를 거의 신앙의 대상처럼 떠받드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탁(神託)을 구하듯 혈맹을 찾는 것은 부끄러움을 넘어 현기증이 날 정도다. 기가 막힌 것은 평소 ’국격(國格)‘을 몹시 내세우는 이들이 강력한 타국에게 ’혈맹‘이라는 ’인연‘을 빌어 “우리나라 대통령 탄핵받지 않게 해달라”는 식으로 성조기를 휘두르는 정경이었다.
나라건 개인이건 상대가 별로 챙기지 않는 인연을 너무 강조하면 우선 남사스럽다. 이를테면 자신보다 훨씬 부자거나 권력이 있어 자신을 별로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돈을 줄곧 '사돈'이라며 가까이 하려 들면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기 마련이다. 나라의 경우라고 다를 리 있는가. 그럼에도 일부 계층의 ’혈맹‘사랑은 식을 줄 모른다. 그들은 박근혜가 탄핵에 이어 구속되자 자유한국당 대선후보 홍준표의 선거운동에 성조기들을 동원하고 있다.
심지어는 트럼프가 한국에 사드 비용 10억 달러를 내라는 무뢰배 같은 요구를 해도 성조기 사랑, 아니 성조기 신앙은 시들 기미가 없다. 그러다 보니 새삼 ’혈맹 사랑‘의 공과가 궁금해진다. 다시 말해 성조기 집회로 한국이 미국의 한 주처럼 보이는 등 국격이 실추된 것은 도외시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는 실속이라도 차렸을까 하는 의문이다.
예를 들어 최근 미국과의 사드 비용을 둘러싼 협상 등에서 성조기 집회는 어떤 작용을 할까. 트럼프는 물론 그 요란한 성조기 집회를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사드 흥정을 할 때 그는 한국인들의 ’성조기 신앙‘이 갸륵해 낮추어 요구했을까. 다시 말해 원래 10억 달러를 훨씬 상회한 금액을 요구하려다 10억 달러를 요구했을까.
아니면 한국의 그 성조기 신앙에 자신을 갖고 원래보다 더 많은 액수를 더 당당하게 말한 것일까. 물론 그것은 가상이다. 그러나 사드 비용만이 아니라 다른 외교 현안에서도 성조기 집회는 은연중 미국의 대한 외교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셈법으로는 그 결과가 비관적이다. 한국이 한국전쟁 당시처럼 원조물자를 받아야 하는 처지도 아닌데다 10억 달러 수준으로 국가 부도가 날 상황도 아니라면 트럼프는 국내 생색용으로라도 더 많이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성조기 집회와 정반대의 상황을 가정해보면 쉬이 답이 나온다.
예를 들어 1960년 미일안보조약 파동으로 일본 전역이 반미열풍으로 끓어올라 당시 일본을 방문하려던 아이젠하워가 발도 못 붙인 채 한국으로 날아왔던 상황이라면 ’사드 비용‘이라는 말도 꺼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극한적 상황이라지만 그런 경험만 있어도 자세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것도 ’혈맹 사랑‘의 한 지엽적인 문제일 수 있다. 나는 혈맹 사랑의 가장 큰 걱정은 그것이 우리의 안보 자체에 손상을 줄까 이익을 줄까 하는 의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모두들 혈맹을 다지는 것이 어찌 안보에 손실을 줄 수 있느냐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면 우리는 안보를 위해 뼈를 깎는 노력보다는 ’혈맹 타령‘만 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혈맹 타령에 마비돼 우리의 안보 현실을 잊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반증으로 우리는 북한보다 몇 배나 잘산다고 으스대면서도 막상 전쟁 이야기가 나오면 기가 꺾인다. 그것은 북한이 핵무기 실험을 하기 전부터 전해진 현상이기도 하다. 그런 것에 대한 변명도 마련해 놓은 상태다. 북한은 오직 침략 전쟁 준비만 해서 상대할 수 없다는 식의 논리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인구가 두 배인데다 경제력이 몇 배나 되는 쪽이 국방에 자신을 못 갖는 것은 좀체 보기 드문 중병이다. 그러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배경에는 ’혈맹‘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스꽝스러운 이유로 군복무를 외면한 사람들이 대통령을 할 수 있는 ’별천지‘가 되기도 하고…
한국전쟁 당시 태어난 ’혈맹‘이란 단어는 이제 회갑이 지나 고희를 바라보게 됐으나 우리는 안보 미성년자처럼 ’혈맹‘타령만 한다. 그 철석같은 혈맹 신앙은 베트남이라는 미국의 혈맹이 사실상 버림받아 보트피플이 전 세계 바다를 떠다니는 것을 보고도 식을 줄 몰랐다. 아니 우리는 더 목청 좋게 ’혈맹‘이라는 주문을 외웠다.
그 뒤 올림픽도 개최하고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도 가입했으나 혈맹 타령은 여전하다. 그것은 국격이 손상돼 창피하기 이전에 손실이다.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남에게 몸을 기대듯 떠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우방이 없듯" 천사도 자선가도 없는 것 아닌가.
마침내 대선이다. 5명의 후보가 모두들 나라를 때 빼고 광내겠다고 목청을 돋군다. 나는 그들의 그 현란한 공약을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조그마한 부탁을 하고 싶다. 그것은 한국이 67세가 넘은 만학도로서 ’혈맹‘사랑과 신앙을 졸업하도록 하는 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건 우리는 혈맹 시대와 타국 국기 신앙을 지양한다면 그것은 OECD에 가입하는 것 못지않게 국격을 올리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우리는 그것으로써 국제사회의 '성년'이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대통령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우리 국민들 모두가 지난날의 '혈맹'이었던 베트남을 '선진국'으로 삼아 혈맹을 졸업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2017.05.07 작성
* 양평 <세계일보 문화전문기자,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한국일보 문화부 차장(한국일보 견습 25기) 역임>
2017년 03월 15일
이상한 말 - 그 이상한 뒤안길(02): ‘시해(弑害)’- “스스로 포기한 주권은…” 양평 梁平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yangpy ‘시해(弑害)’는 원래 이상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신하가 임금을 죽이거나 자식이 부모를 죽인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다만 그것이 이상하게 쓰여 이상한 말같이 돼 버렸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시해’라는 용어의 대부분은 10.26사건, 즉 김재규(金載圭)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사건에 쓰인다.
부하가 대통령을 죽인 것과 신하가 임금을 죽인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니 그것은 틀리게 쓰인 말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태연히 사용되고 있으니 더욱 이상한 말이 되고 나아가 이상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10.26을 두고 ‘시해’란 말을 즐겨 쓰는 사람은 임금이나 대통령이나 다 국가원수인데 대통령한테 못쓸 이유가 있느냐는 식으로 말한다. 그들은 죽은 대통령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나라님의 소유인 ‘신민’으로 격하시켜놓고도 태연하기만 하다.
‘시해’라는 말은 10.26직후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이 지휘하던 합수부의 사건 발표 과정에서 처음 나왔다. 나는 그 사건으로 계엄이 선포돼 신문들이 검열을 받는 삼엄한 마당에서 그런 말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잠정적인 현상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 뒤 주로 보수 언론에서 계속 그 말이 쓰이기에 1993년 10.26을 맞아서 나는 당시 내가 근무하던 서울경제신문에 ‘弑害의 施害’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다른 많은 이들도 ‘시해’라는 말을 10.26에 사용하는 것이 부당함을 지적했다.
그러나 큰 공장에서 폐수가 흘러나오듯 유력 보수지들이 쏟아내는 ‘시해’를 무슨 재주로 막을 것인가.
기가 막힌 것은 최근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지에 ‘시해’란 말이 쓰인 것이다. 그것도 최순실-박근혜 사태와 관련된 것이어서 더욱 어이가 없었다.
그 기자는 최순실 사태와 피살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별개라고 생각했을까. 나아가 그 윗선도 그런 생각이어서 그 기사가 데스크 과정에서 시정되지 않고 나왔을까.
그들은 왜 오늘날의 최순실 사태가 ’弑害‘의 施害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이 어느 민주국가의 일 같은가, 아니면 진령군(眞靈君)이 설치던 구한말의 민비 시대의 일 같은가?
그것은 비단 최순실 사태만이 아니다. 나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이 독재나 폭정의 문제이기 전에 부패한 왕조의 잔재에서 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은 건국 초기부터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무능한 왕조가 외세에 나라를 빼앗겼다가 외세에 의해 나라를 되찾은 국민에게 민주주의니 주권(主權)이니 하는 것은 낯선 것일 뿐이었다.
그들은 ’장미공주‘ 이야기의 1백년간의 잠은 아니지만 36년간의 잠을 자다 깨어났을 뿐이었고 그 풍경은 ’장미공주‘의 그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장미공주‘에서 아래 시종을 패던 중 잠에 빠졌다 깨어난 윗 시종이 그 주먹질을 이어가듯이 일제의 작위를 탐내던 구한말의 지도층을 이어받은 그 후손들은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재산을 탐내는 식으로 가문의 전통을 업그레이드 시켜나갔다.
그런 마당에 ’민주주의‘니 ’대통령‘이니 해보았자 그것을 보는 눈은 36년 전의 시각에서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19세기말의 기억을 가진 이들은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말을 들었을 때 40여 년 전의 ’황제‘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외세에 왕비가 죽어도 응징도 못하고 다른 외세의 공관으로 피신했던 왕이 이듬해인 1897년 아관(俄館)에서 나오자 갑자기 ’황제‘가 됐으니 국민들의 눈에 ’황제‘가 ’임금‘보다 대단해 보일 리가 없었다.
그것을 만회하려 해선지 너무 거창한 제복을 입은 것도 따지고 보면 서글픈 민족의 자화상이었다.
고종은 왜 하필이면 독일 황제의 복장을 본 땄을까. 당시 독일은 제국주의의 맹주 자리를 탐하던 시기 아닌가.
당시의 세계를 동물의 세계로 보자면 조선은 피식(被食)동물이고 뒤늦게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든 독일은 포식 동물의 정상인 호랑이나 사자 격인 영국과 프랑스와 맞설 채비가 한창이던 시기였다.
그런 판에 사자의 가죽을 둘러쓴 산양의 모습이 당시 맹수국가들의 눈에는 얼마나 우스꽝스럽고도 맛있게 보였을까.
황제가 임금과 비슷했듯이 대통령도 임금과 비슷한 것으로 본 우리 국민들을 탓할 수만도 없다.
하필이면 초대 대통령이 양녕대군의 후손이 되다보니 그런 풍조는 더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李承晩)과 조선왕조의 관계를 두고는 엇갈린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하나는 민주주의의 본바닥인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주주의자 이승만이 체질적으로 왕조를 싫어했다는 설이다.
이승만이 구황실 인사들을 박해해 영친왕(英親王)이 끝내 이승만 재위시절에 환국하지 못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승만이 양녕대군의 후손이라는 점을 자주 자랑했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그가 구황실 인사들을 박해한 것도 민주주의자로써 군주주의를 배격한다는 시각이라기보다는 양녕대군의 후손으로써 충녕대군의 후손들인 당시의 구황실인사들에 대한 혐오감정의 발로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이승만의 여러 거동에서도 민주주의의 본바닥에서 교육받은 지식인보다는 왕 같은 풍모를 느끼게 하는 일이 많았다.
바둑과 얽힌 이승만의 한 에피소드도 그런 느낌을 준다. 그가 한국기원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바둑에 몇 단까지 있냐고 물었으며 9단까지 있다고 하자 “그럼 나는 10단이야”라고 했다는 일화다.
한국기원 인사들은 바둑 9단이 입신(入神)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입신이라고 해봤자 백성이 죽어서 된 귀신인데 대수로울 게 있느냐는 생각이었을까.
한국전쟁 당시 국민들에게 안심하라고 한 뒤 대구로 피신한 모습도 임진왜란 당시 한성을 버리고 의주로 부랴부랴 몽진한 선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승만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부인이 외국인이어서 외척이 없었고 자식이 없었던 점이다.
아들이 없어 국회의장이자 후계자인 이기붕(李起鵬)의 아들 이강석(李康石)을 양자로 들이자 그가 일으킨 요란스런 화제들은 역으로 이승만의 친자가 없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를 말해준 셈이다.
이강석이 학생들의 반대에도 서울법대에 편입학으로 들어간 데는 왕자가 공부하겠다는데 무슨 입학시험이냐는 기류가 깔려 있었다.
이강석은 학생들의 냉대로 서울법대를 그만두었으나 대낮에 명동 파출소장을 구타하는 등 수많은 화제를 뿌렸다.
가짜 이강석 사건은 거기서 파생한 곁가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 젊은이가 이강석을 사칭하며 지방 관서에 들르자 모두들 ’귀하신 몸‘이라고 황송해 하며 칙사대접을 했다. ’귀하신 몸‘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간판을 단 왕국에서 통용되는 왕자의 호칭인 셈이었다.
이승만이 민주국가의 대통령다운 말을 한 것으로 기억에 남을 만 한 것은 4.19로 물러날 때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한 말이다.
하지만 그 배경을 들여다보면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는 4.19로 200여명의 젊은이들이 죽은 뒤 1주일이 지난 4월26일에야 국민이 원하는 것을 알았단 말인가. 그는 그 사이에도 자유당과 결별하는 등 자신의 생존을 위해 부단히 애쓰는 한편 미국 측과도 숨가쁜 논의를 거쳤으나 미국의 자세가 완강하자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국민이 원해도 미국이 강력히 원하지 않는다면 하야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1주일을 보낸 셈이다.
이승만이 물러나고 들어선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은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그의 성향과 관계없이 말 그대로의 대통령이었다. 굳이 왕을 떠올린다 해도 엘리자베스 여왕 같은 입헌군주국의 왕에게나 주파수를 맞춰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5.16으로 민주당 정권이 물러나고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외척과 공주(영애)들 및 왕자(영식)까지 갖춘 왕국의 면모였다.
박 씨들은 그만두고 육영수의 생가마저 웅장하게 복원되고 그의 탄신제와 추모제가 국비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도 그렇다. 그래선지 그의 탄신제나 추모제에 나타나 이러쿵저러쿵 하는 도백이나 군수가 왠지 백성을 돌보는 지방관이 아니라 왕조시대의 능참봉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박정희의 치세가 어떤 성격이었는지는 그가 피살된 것을 ’시해‘라고 표기한 것이 상징적으로 말해준 셈이다. 그는 왕조시대의 언론을 남기고 간 것이다.
그의 뒤를 이은 전두환 시대는 왕조의 면모가 많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우선 박정희와 전두환은 카리스마에서도 차이가 났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팔아먹었던 노하우는 이제 더 통하지 않아서 그는 ’혁명공약‘이라는 그럴듯한 술수를 부릴 수도 없었다. 그저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모조품 격인 ’국보위‘나 만들었으니 카리스마가 생겨날 근거가 박했다.
더욱이 임기가 짧아 국민들은 그가 몇 명의 영애와 영식이라는 공주와 왕자를 거느린 지도 제대로 모른 채 임기가 끝났다.
국민들 대부분이 박정희의 세 자녀 이름을 다 알고 있었던 데 비해 전두환의 2남1녀 가운데 하나라도 이름을 아는 국민은 절반도 못될 것 같다.
하지만 전두환의 경우도 왕조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다. 그의 미국 방문 중 이순자는 한 모임에서 이상한 모자를 쓰고 나왔으며 그것은 한국 왕비들이 쓰는 왕비관으로 알려졌다.
이순자의 경우 X양 사건도 아직 명쾌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소문대로라면 그것은 왕조시대에나 있을 법한 사건이다.
그것은 임오군란 무렵 민비와 관련된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군란이 일어나자 민비는 황급히 충주로 피난을 했으나 당시의 통신 사정으로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확인도 어려웠다. 그러자 고종은 지난날 총애했으나 민비가 무서워 멀리 두었던 궁녀를 가까이 했다.
그 뒤 충주에서 돌아온 민비는 그 궁녀를 잡아다 당시의 소형 다리미 격인 인두로 지졌다는 끔찍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전두환의 뒤를 이어 ’보통 사람‘을 표방하여 대권을 잡은 노태우는 그 구호에 걸맞게 왕조의 분위기는 거의 풍기지 않았다. 물론 그가 물러난 뒤 2천억 원 대의 ’내탕금(內帑金)‘을 숨겨 논 것이 적발돼 쇠고랑을 찬 것은 예외로 치자.
그런 분위기는 김영삼 시대에 더 가속됐다. 3당 야합으로 어딘지 짝퉁 민주운동가처럼 비치기도 했지만 그는 왕조시대의 모습을 지우는 데 앞장섰다.
그가 안가를 철폐한 것도 그런 것이다. 말이 ’안가‘지 많은 국민들의 눈에 그곳은 왕조시대의 ’후궁‘처럼 비쳤고 10.26사건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아쉽게도 머리를 빌려야 했던 김영삼은 그의 아들(현철)의 머리를 중점적으로 빌린 바람에 ’황태자‘를 낳고 말았다.
하지만 그 황태자가 아버지의 재위 중 감옥에 갔으니 그는 왕이 아닌 채로 임기를 마친 셈이었다.
그 뒤를 이은 김대중은 일단 정통파 민주주의자라는 점에서 그의 집권은 한국 역사가 왕조시대를 탈피하는 데 거보를 내디딘 셈이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각하‘라는 왕조시대적 존칭을 철폐했다. 그로써는 ’각하‘ 대신 ’님‘이라는 말도 쓰지 말도록 하고 싶었을 것이다. 원래 ’대통령‘이라고 하면 거기에 존칭이 다 들어 있는 것 아닌가. 일본의 경우 ’교수‘니 ’장관‘이니 하는 모든 직책 뒤에 ’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김대중 자신이 그것을 지적하면서도 갑자기 호칭이 없어 어색하다면 ’님‘을 붙이라고 했다. 그것은 새삼 개혁과 인습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다.
김대중의 아들들도 구설수에 올랐다. 그러나 ’황태자‘로 불리지는 않았고 또한 대통령 아들로 감옥에 갔으니 한국은 왕조시대로부터 민주공화국으로 가는 과도기에 접어든 느낌이었다.
그런 추세는 인권변호사 출신인 노무현에서 가속됐다.
그가 검사들과 기탄없는 대화를 나눈 것은 그런 점에서 여러 가지를 시사했다. 그가 자신만만하다 못해 방자한 검사들에게 곤혹을 치룬 것은 한국이 제왕적 대통령 시대를 급속히 청산해가는 모습과 함께 아직도 건재한 왕조시대의 기고만장한 ’사또‘들을 보여주는 듯해서다.
그의 자살도 그런 점에서 명암이 교차된다. 대통령도 법 앞에 평등함을 보여준 것 같기도 하지만 왕조 교체시의 잔인한 그림 같기도 해서다.
예를 들면 이성계가 집권하자 왕(王)씨들을 몰살하려들어 왕 씨들이 王자와 비슷한 全씨나 田씨로 개명했다는 이야기 같은 것이다.
노무현은 정권을 재창출하지 못했으나 우리 역사의 왕조 청산과정은 이어졌다. 아니 이명박은 제왕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대통령이었다.
기업인 출신으로 ’경제대통령‘을 표방한 것이 우선 ’민주화‘를 곧잘 들먹이던 지금까지의 대통령들과는 달랐다.
여기에다 BBK의혹을 비롯해 전과 14범이라는 등의 너절한 소문만으로도 제왕과는 담을 쌓아야 했다.
경제대통령이라기보다는 어딘지 장사꾼 같은 그의 이미지도 그랬다. 그를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수단 좋은 장사꾼 같고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악덕상인 같은 정도의 차이였을 뿐이다.
건설업자 출신인 그는 재직 중 4대강 사업의 공사감독 같은 역할에 바빠 임금노릇은 염두에도 없었다.
그가 장사꾼처럼 흥정에 능한 것도 권위를 내세우는 임금노릇과는 거리가 멀었다. 원래 대운하를 내세웠던 그는 각계의 반대에 몰려도 ’진노‘하지 않고 꿩대신 닭 식으로 흥정해 4대강 사업을 관철시켰다.
그의 뒤를 박근혜가 이었을 때 사람들은 왕조의 청산이라는 측면에서도 큰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우선 여성이라는 부드러움이 그렇고 현대교육을 받은 그가 독재를 하다 비명에 간 아버지를 반면교사로 배운 바가 있으리라는 기대에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준비된 제왕‘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제왕 준비라는 점에서 ’시해‘를 당한 그의 아버지도 능가했다.
박정희가 20대에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고 일본 천황에게 혈서를 쓰는 등 고생을 했다면 박근혜는 그 나이에 이미 중전마마 노릇을 한 셈이다.
그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범접하기도 어려울 만큼 서슬이 푸른 원로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즐겼으며 끝나면 이들로부터 90도의 절을 받는 수련을 쌓고 있었다.
그는 제왕의 필수적 기능인 진노(震怒)하는 법도 일찍 터득했다.
그가 1978년 자신이 총재로 있던 구국여성봉사단이 <새마음>이라는 기관지를 창간했을 때의 한 에피소드도 그렇다. 그는 청와대 정원에서 기자들과 다과를 들면서 자신이 창간한 잡지를 내놓고 어떠냐고 물었다.
이에 한 기자가 다 좋지만 기사에서 <박근혜 총재님이 접하시고…>식의 극존칭은 좀 거슬린다고 말하자 박근혜는 벌떡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 박근혜는 기자들과의 모임에서 그 기자의 말을 통렬히 반박했다고 한다.
그가 어떻게 비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분위기는 2015년 박근혜가 유승민의 ’배신의 정치‘를 비난한 것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박의 진노에 유승민은 당에서 쫓겨나는 등 수난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 진노가 부머랭이 돼 박근혜의 몰락에 일조한 것은 그 뒤의 일이다.
박근혜가 재위 중에 받았던 비난 가운데 상당부분은 왕이 대통령 노릇을 한 데서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불통(不通)‘ 시비도 그렇다. 왕이 왜 백성과 통해야 하는가. 왕은 하달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가 탄핵에 몰린 상황에서 검찰 수사를 받겠다고 했다가 시침뗀 것도 그렇다. 박근혜에게는 장부일언이 중천금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고 그것은 그가 장부가 아닌 여자여서라기보다도 제왕이어서라고 봐 줄 수는 없을까. 약속은 대등한 사람들끼리의 일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최순실도 눈치가 여우처럼 빠른 상궁 정도로 봐줄 수 있는 일 아닐까.
그 박근혜가 탄핵되자 신문들은 박정희 프레임의 종언이라고 썼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박근혜가 탄핵된 2일 뒤 조선일보는 <’박정희 시해‘ 김재규 묘소에 ’박근혜 파면 보도‘ 신문과 꽃다발 가득>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의 ’시해‘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박정희 프레임은 무너졌지만 한국은 아직 왕조 시대를 벗어나지는 못한 것으로 보아야 할 일이다.
신문들의 ’시해‘ 사랑을 보면 불현 듯 1950년대의 박인수 사건이 떠오른다. 그는 한국판 카사노바로 수많은 여성들을 농락해 혼인빙자간음죄로 법정에 섰으나 법정은 “스스로 포기한 정조는 법으로도 지켜줄 수 없다.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고 판결했다.
그 판결문을 원용하자면 “국민 스스로 포기한 주권은 법으로도 지켜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더 장황하게 말하면 “보수신문이 앞장서고 주권을 지킨다는 진보신문들이 뒤따르며 내버린 주권은 단군도 예수도 보호할 수 없다. 물론 하늘나라에서 영세를 누리고 있는 영세교주 최태민도…”
2017.03.14.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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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3월 14일
여름에 그토록 짜증스럽더니 겨울에까지 또... 박강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parkk 짜증스럽습니다. 국민을 말할 수 없는 실망에 빠뜨리고 허탈감으로 몰아가고서도, 잘못했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난 여름 너무 더워서 짜증스러운데, 이상한 사람들이 나와서 더 짜증스러웠습니다. 여름 가면 그 짜증이 물러가겠거니 했더니 겨울 오자 몇 갑절 더해져서 왔습니다. 하도 짜증스러워서 지난 여름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 때 쓴 짧은 글을 다시 읽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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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더위도 갑니다만...
2016년 여름 더위는 8월 26일에서야 갔습니다. 2010년에는 8월24일에야 더위가 갔습니다. (이 날짜들은 기상대가 발표한 것이 아니라 제 일기장에 적어 놓은, 8월말 열대야 끝날입니다.)
8월 10일쯤 되면 해 진 뒤엔 시원해지고 동해안 해수욕장 썰렁해지던 것이 까마득한 옛날 일이 돼 버렸습니다. 여름에는 아외활동하기 좋아 기다리기도 했는데, 이제는 여름 오는 것이 두렵습니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 시내에서 모임이 있어 나갔다가 지하철 타고 귀가하는데, 옆자리 노인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덥지요? 왜 이렇게 더운지 아십니까?" "...."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어서 하나님이 노하신 겁니다. 정신들 차리지 않으면 곧 불로 심판하십니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었더니, 그는 검찰 고위 간부 진모씨와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우모씨의 무한탐욕, 음주운전하다 사고 내고도 경찰청장 하겠다는 이모씨 의 뻔뻔함을 자근자근 씹고, 국회의원을 포함한 정치인 몇을 작살냈습니다.
그가 그러고 나서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려 할 때, 나는 지하철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쳐갔습니다. 차내 전도 대상으로 점찍었다가 놓친 것 같았습니다.
폭염도 폭염이지만, 이 여름에 더 짜증나도록 한 것은 바로 그 노인이 개탄했던 대상들이 한 짓거리들입니다.
여름도 겁나지만, 해가 갈수록 혹한 일수가 많아지는 겨울도 무섭습니다. 다가울 겨울에는 긴 혹한도 없고 짜증나게 하는 사람들도 없었으면 합니다. 2016.08.28
-2017.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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