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통신 [칼럼니스트]
언론인들 집필 by 서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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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 01일
국어가 교과의 첫째인 것은 - 말하기, 쓰기, 짓기, 듣기의 중요함 박강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parkk
오래된 기억인데, 학교생활기록부에는 교과학습발달상황과 행동발달상황이 적힌다. 앞 것은 수우미양가, 뒷 것은 가나다로 평가한다. 우등상장의 글은 대개 “위 학생은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하여 다른 이의 모범이 되므로 이 상을 줌. OO학교장 아무개”로 돼 있는데, 학업성적은 교과활동 평가이며 ‘수’가 많아야 우수하고, 품행은 행동 평가인데 ‘가’가 많아야 방정하다. 즉, 우등상은 공부 잘하고 범절 반듯한 학생이 받는다. 그런데, 국어가 교과의 첫째인 것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어에는 말하기, 쓰기, 짓기, 듣기의 네 항목이 있다. 말하기와 짓기는 듣기나 쓰기보다 능동적인 만큼, 사회에서 활동할 때 상대적으로 책임이 따르는 경우도 더 많다. 이 책임은 지위가 높고 권한이 클수록 무겁다. 그런 사람은 바른 말과 바른 글을 내보내는 데에 늘 신경 써야 하는 짐을 지고 있다.
같은 말이라도, 사석에서 할 수 있지만 공석에서 그대로 쓸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가령 “정치는 고스톱판입니다.” “외교는 밀당입니다.” 갈은 표현은 사석에서는 쓸 수 있겠으나,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럴 수 없다. 지위가 높고 권한이 크면, 사석에서도 쓰지 못한다. 사석에서 한 말이라도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흥미를 일으키거나 중요한 일과 연결될 때는 그대로 보도될 수 있기에 그러하다. 공인의 언행은 늘 언론 보도의 표적이어서 한시라도 말조심하지 않으면 난처한 지경에 빠진다.
동향 출신 주요 권력기관 인사 몇몇이 1990년대 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은밀하게 복집에서 선거 전략을 짜면서 “우리가 남이가?” 했던 말을 누군가가 몰래 녹음한 것을 공개하여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일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하였다면 문제가 아니지만, 권력자들의 모임에서 그러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국가의 기둥들이 패거리 지어 공정선거를 위한 노력과는 동떨어진, 지역감정 부추기로 선거에서 이기자는 통모를 심히 통속적으로 했다는 사실이 많은 국민을 실망하게 하였다. 의도도 그렇고 말도 그렇고, 국민의 세금을 받고 일하는 고위 공직자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2010년대 초,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분이 취임 뒤 첫 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물론, 전세계 인류에 대박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때 ‘대박’이란 말의 사용은, 유머 감각을 풍기기는 하지만, 진지하게 접근하여야 할 통일이라는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표현으로서 아무래도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대박, 피박, 면피가 화투놀이인 고스톱에서 쓰는 말임은 대개들 안다. 그리고, 대박이라면 “뜻밖의 큰 얻음‘, 또는 ’횡재‘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잭팟(jackpot), 보난자(bonanza) 등이 그 느낌을 살리는 영어 대역어로 등장했으나 국가정책을 가리키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아, ‘획기적 발전’을 뜻하는 브레이크쓰루(breakthrough)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었다. 어쨌든, ‘통일대박론’이 통일에 대한 관심을 높인 공로는 있다. 관련 공무원들이 이 말을 듣고 뭐 좀 해 보려 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2000년대에는, 국가의 근간을 규정한, 법 중의 법을 “그 놈의 헌법”이라고 말한 분이 있었다. 막중한 자리에 취임할 때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라고 선서한 분이었다. 그 선서문은 “국가를 보위하며...“로 이어지는데, 그런 선서를 한 분이 국민 의무인 병역 수행을 ”군대에서 썩는다.“고 말하여, 군복무 마친 것을 긍지로 여기는 많은 이들을 화나게 하였다. 이 분이 전하려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었으나, 품위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 분의 발언들은 종종 ‘말의 품격’에 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고는 했다.
위 경우들은 말의 품격과 관련돼 있지만, ‘상황’과 어긋난 발언으로 지탄을 받은 이도 있다. 일류 병원으로 알려진, 서울의 한 병원이 메르스에 엉성하게 대처하여 2015년 6월 14일 현재 국내 메르스 환자 145명 가운데 절반 가까운 72명이 병원을 거쳐간 사람들에서 나왔다. 이 병원에서 메르스에 감염되었을 사람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늘어날지 모른다. 이 병원만 잘 했다면 국내 메르스 환자를 적어도 절반은 줄일 수 있을 것이고 감염 전달 우려도 적었을 것이다. 그 병원의 담당 과장인 의사는 자기네 병원이 뚫린 것이 아니라 “국가가 뚫린 것”이라고 국회에 나와 말하였다. 국가의 방역 관련 부서가 제때 정보를 일찍 공개하지 않아 이 병원이 억울한 구석이 있을 것이고 날이면 날마다 메르스 때문에 담당 의료진의 고생이 이만저만 심한 것이 아니겠으나, 정부 메르스 상황 발표 뒤에도 이 병원이 한 어설픈 대처가 속속 드러나면서, 책임 전가로 들리는 병원 간부의 투정은 엄청난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우선 사과부터 하고 앞으로 더욱 철저하게 메르스 확산을 막겠다고 다짐하는 자세가 필요한 상황임을 생각하지 않고 말한 결과였다.
보통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 가운데도, 이상하게 변해가는 말들이 있고,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의 품위를 생각해 보게 하는 경우가 있다. 백화점이나 가게의 점원이 파는 물건을 ‘이것, 저것‘ 대신에 ’얘,쟤’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하도 들어서 이상하지도 않을 정도다. “얘가 요즘 잘 나가세요. 쟤는 좀 저렴하시고요. ” 당치 않은 존대까지 한다. 대명사 파괴와 존댓말 혼란은 이 시대 국어가 맞은 최대 액운이다. “전에는”이라고 하던 말을 “기존에는”이라고 쓰는 것은 또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엄청나게”는 “엄청”으로 줄여져 고정되는 단계에 왔다.
그 뿐만 아니라 엘리트들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제작하거나 참여하는 신문과 방송에서도 틀린 말이 너무 많이 나와 짜증난다. 어느 날 라디오를 들으니 한 방송 출연자가 낙타의 젖을 낙타우유라고 연신 말하고 있었다. 한 텔레비전 방송은 가수 손아무개가 자살하려고 했던 것을 긴급히 알리면서 “자살 시도”라는 자막을 넣었다. “자살 기도”라야 하는데 잘못 쓴 것이다. 시도와 기도는 다르다. 시도는 “되나 안 되나 해 보기”다. 자살이 되나 안 되나 해 보는 사람도 있나?
방송을 들으면 ‘역대’(歷代)라는 말도 이상하게 쓴다. 올해 가뭄이 심해 소양강의 수위가 심히 낮아진 것을 보여주면서 “역대 가장 낮은 수위”라고 하였다. 이는 “소양댐 건설 이래 가장 낮은 수위”라고 해야 할 말이었다. 날씨 보도 때 “역대 가장 낮은 기온”이라는 말도 예사로 쓰는데 들을 때마다 거슬린다. ‘역대’는 초대, 2대, 3대... “이어 내려온 모든 대” 또는 “각각의 대”를 말한다. “효과적인 부패방지법 제정을 역대 어느 국회도 하지 못했다.” “조선 역대 임금 가운데 영조의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다.”처럼 쓸 수 있다. 소양강이나 소양댐에 무슨 대 이을 일이 있나?
서울에서 나오는 큰 신문의 문화부 중견 기자가 한 남자 배우에 대하여 ‘묘령‘(妙齡)이라고 썼다. 이 남자 배우 꼼짝없이 신문지면에서 성전환당하고 말았다. 또 어떤 연예 담당 기자는 연예인에 관해 쓰면서 “흡인력이 강하다” 대신 거듭거듭 “흡입력이 강하다”고 하였다. ‘흡인력’도 적절한 말 같지는 않지만 ‘흡입력’은 정말 괴이하다. 그 연예인은 졸지에 대중을 마셔버리는 거대 괴물이 되었다.
인터넷 웹사이트,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문자메시지, 밴드 등 누구나 쓸 수 있는 매체들이 널리면서 말도 안 되는 말들이 홍수처럼 국어를 망가뜨리고 많은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어떤 것은 지적하기조차 민망할 지경이다. 2013년 경남 OO에서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공사 현장에서 경찰의 저지에 맞서 격렬하게 시위했다. 그들은 대개 노인들이었으므로 건강 상태가 염려되었다. 한 노인이 음독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고 다른 주민의 자살 기도가 이어지는 등 사태가 심각했다. 이 해 12월 ‘OO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가 발표한 ‘OO 송전탑 세 번째 자살기도 사태를 지나며, OO 주민들이 사회 각계에 드리는 호소문’은 “1.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오고 가슴이 용두질칩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시위에 개입한 젊은 사람이 ‘용두질’의 뜻을 잘못 알고 쓴 듯하다.
‘소인배’라고 할 때 ‘배’(輩)는 ‘무리’로 새기는데, 선배니 후배니 동배니 할 때를 빼고는, 무뢰배, 폭력배, 정상배처럼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소인배’ 반대 되는 말로 ‘대인배’라는 말을 만들어 쓰고 있는데,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 사람 대인배더라.”하고 싶을 때라면 “그 사람 ‘대인풍’(대인다운 풍모)이야.”하는 것이 낫겠다.
책을 잘 읽지 않고 신문도 잘 보지 않는 것이 근래 세상 풍조라 낮은 연령층은 대개 국어 어휘력이 약하다. 어휘력 약한 것의 원인에는 국어를 등한시하는 사회 분위기 탓도 있을 것이다. 요즘 초등학교에서 책읽기를 권장하고 있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읽기와 쓰기를 제대로 해야 말하기와 짓기도 잘할 수 있다, 듣기에는 언어 청취력뿐만 아니라 남의 말을 귀담아 듣는 태도도 들어가니 이 또한 중요하다. 남의 말 안 듣고 제 말만 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 2015.06.14 작성. [敎育評論] 2015년 7월호(통권272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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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서울칼럼니스트 | 2015/08/01 00:02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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