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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4 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12 끝) (김동호)
2008/09/03 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11) (김동호) 2008/09/02 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10) (김동호) 2008/08/31 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9) (김동호) 2008/08/30 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8) (김동호) 2008/08/29 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7) (김동호) 2008/08/28 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6) (김동호) 2008/08/27 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5) (김동호) 2008/08/26 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4) (김동호) 2008/08/25 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3) (김동호) 2008년 09월 04일
부산시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빼놓을 수 없다. 첫해 3억 원을 지원했던 시는 올해 30억 원을 보조했다. 1998년에 처음으로 7억 원을 내놓았던 정부도 그 액수를 늘려 올해 14억 원을 지원했다. 또한 매년 20억~30억 원에 달하는 기업 및 민간의 협찬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부산국제영화제가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첫해부터 부산국제영화제가 관철해 온 '관과 정치로부터의 독립' 또한 성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창설된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없어진 광주국제영화제, 성장추세에 있다가 크게 흔들렸던 부천국제영화제는 시당국과 주변지원세력의 개입에서 빚어진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 온 시의 정책이 오늘의 부산국제영화제를 있게 한 배경이라고 하겠다. 또한, 매년 300~800명에 이르는 자원봉사자와 스태프들의 헌신적인 노력은 부산영화제를 성공케 한 가장 큰 동력이다. 이들이 있기에 부산국제영화제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영화제'로 회자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부산국제영화제가 빠른 기간에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부산시민들과 영화 팬들의 적극적인 성원과 동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시민의 영화제인 동시에 영화인 모두의 것이며 전국에 있는 영화 팬들이 그 주인인 것이다. [칼럼니스트] 2008년 9월 4일 1471호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12 끝) 2008년 09월 03일
최소한 600억~700억 원 규모의 랜드마크가 될 건물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2년과 2005년 프랑크 게리가 설계한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을 두 번 방문했고, 2003년 11월 23일에 개관한 LA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도 두 번을 찾았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호주를 상징하듯이 부산영상센터가 부산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굳혔다.
[칼럼니스트] 2008년 9월 3일 1470호 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11) 2008년 09월 02일
부산영화제 창설 준비가 한창이던 1996년 4월 10일, 나는 주한스위스대사관 문정관 집에 초청받았다. 마르코 뮐러의 방한을 계기로 그와 친척관계에 있는 문정관이 스위스대사 부부와 메세나 협회의 김치곤 사무처장 그리고 나를 집으로 초청한 것이다.
나는 마르코 뮐러에게 영화제창설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고 협력을 부탁했고 그는 쾌히 승낙했다. 그러다가 나는 무심코 토니 레인즈가 돕고 있다는 말을 하자 그는 즉각 안색이 변하더니 "그렇다면 같이 잘해 보라"고 말하면서 영화제에 관한 말을 중단했다. 알고 보니 중국영화 전문가인 두 사람은 경쟁관계였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칼럼니스트] 2008년 9월 2일 1469호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10) 2008년 08월 31일
제1회 영화제가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부산의 영화계와 언론계 일각에서 부산국제영화제를 왜 서울사람들이 와서 하느냐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2회영화제마저 성공하면서 이 여론이 표면화되었다.
나와 함께 영화제를 창설했고 경성대에서 10년간 재직했던 이용관 교수조차도 제1회 영화제가 끝난 후 '부산정서'에 대한 갈등으로 사퇴하겠다고 3개월간을 고집했을 정도였다. 나도 몇몇 사람에게 3회까지만 하고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의 여론형성인사들이 모인 신사고 포럼의 '올해의 부산인상'은 나에게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했고 영화제에 대한 의욕과 집념을 불태우게 한 계기가 되었다. 회원 간의 격론 끝에 부산사람이 아닌데도 부산인상을 주는 것이 '신사고' 정신에 맞는다는 논리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고... [칼럼니스트] 2008년 8월 31일 1467호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9) 2008년 08월 30일
2001년 제6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칸, 베를린 두 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부임한 첫해에 모두 부산을 찾게 됨으로써 부산의 위상은 더 없이 높아졌다. 2002년 제7회영화제 때는 지난해 부산에 처음 왔던 칸과 베를린 집행위원장은 물론 모릿츠 데 하델른 베니스영화제 집행위원장도 함께 부산을 방문했다. 세계 3대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나란히 부산에 나타난 흔치 않은 모습은 전 세계 매스컴을 탔고 부산영화제의 명성은 다른 영화제의 선망의 대상이 됐다.
[칼럼니스트] 2008년 8월 30일 1466호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8) 2008년 08월 29일
첫해에 3억 원을 지원했던 부산시는 1997년(2회)부터 2000년(5회)까지 4년간 매년 5억 원을 지원하는데 그쳤다. 그러다가 안상영 시장에 의해 2001년 7억3200만 원, 2002년 10억 원, 2003년 12억 원, 2004년에 13억 원으로 늘었고, 허남식 시장에 의해 다시 2005년에 18억 원, 2006년에 28억 원, 2007년에 30억 원으로 대폭 증액되었다. 정부나 부산시의 예산을 확보하는 일보다 기업의 스폰서를 구하는 일은 몇 배가 더 힘들었다. 지난 12년간의 메이저 스폰서의 변동만 보더라도 부산국제영화제의 취약하고도 불안정한 재정구조를 쉽게 알 수 있다.
고교동기인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의 부인 정희자 회장의 배려로 1, 2회 각각 3억 원, 3회 2억 원의 지원을 받았다. 2회 때 3억 원을 협찬했던 SK텔레콤은 센텀시티에 대한 투자를 포기하면서 3회 협찬을 중단했지만 한때 차관을 같이했던 서정욱 사장의 도움으로 2000년에는 KTB 네트워크가 3억 원을 협찬했다가 2001년에 1억 원으로 줄었으며 다음해에는 중단되었다. 2002년과 2003년에 각각 4억 원을 지원했던 포스코건설(RDS)은 2004년에는 영화제 직전에 파산함으로써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네이버 운영사인 NHN이 2005년 2억 원, 2006년과 2007년 각각 5억 원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올해 처음으로 제일모직 빈폴에서 10억 원을 협찬했다. 이렇게 해서 부산국제영화제의 예산은 해마다 늘어 1회 22억 원에서 12회 80억 원으로 증액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기업인과 후원자들의 성원이 뒷받침되었음은 물론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부산영화제의 예산은 세계유수 영화제에 비해서 한참 뒤처진다. 부산영화제가 안정기조 위에서 또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정부보조의 대폭적인 증액과 함께 기금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칼럼니스트] 2008년 8월 29일 1465호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7) 2008년 08월 28일
로테르담영화제 집행위원장인 사이먼 필드와 나는 막역한 '술친구'였다. 지금도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 대만의 세계적인 거장감독 허우 샤오시엔, 네덜란드 언론인 피터 반 뷰렌 그리고 사이먼과 나, 이렇게 다섯 명은 부산과 해외에서 1년에 몇 차례 만나 밤새 술 마시는 '타이거 클럽' 멤버다.
[칼럼니스트] 2008년 8월 28일 1464호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6) 2008년 08월 27일
극장환경이 열악했던 당시, '껌'과 '고양이 사건'도 잊을 수 없는 일화 중 하나다.
개막을 앞두고 극장화면을 점검하기 위해 의자에 앉았던 문정수 시장의 바지에 껌이 달라붙어 관계직원들이 혼쭐이 났던 일도 있었고, 영화를 심사하던 독일의 에리카 그레고르 여사는 쥐에 물려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오석근 사무국장은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극장에 풀어 넣었다가 영화상영 도중에 고양이가 울어 이번엔 고양이를 잡는 소동도 일어났다. [칼럼니스트] 2008년 8월 27일 1463호 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5) 2008년 08월 26일
나는 정치인들의 축사를 없애는 방편으로 청와대에 대통령의 영상메시지를 요청해서 이를 영화제 때 틀었다.
'국가원수의 메시지'라는 것을 방패로 당시에 참석했던 국회의 상임위원장, 문화관광부 장관의 축사요청을 거절했고, 부산시장도 환영사 없이 개막선언만 하도록 했다. 개막식에서 아무런 역할이 없어진 주무장관은 그 후 몇 년이 흐르도록 부산영화제를 찾지 않았고, 대통령 영상메시지도 3회부터 없앴다. '지원은 받되 간섭은 배제한다는 원칙'의 고수와 자율성이 오늘의 부산국제영화제를 있게 한 것이다. [칼럼니스트] 2008년 8월 26일 1462호 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4) 2008년 08월 25일
1996년 2월 13일의 창립총회를 통해 사단법인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가 정식 출범했지만 헤쳐 나가야 할 과제는 너무나 많았다. 먼저 운영체제부터 갖추기 시작했다.
인선과정에서 시와의 마찰은 있었지만 오세민 정무부시장, 박광수 감독, 주윤탁 교수를 부위원장에 위촉했고, 영화제 업무 전반을 이끌 프로그래머는 이용관(한국)과 김지석(아시아) 전양준(월드)이, 사무국장은 오석근 감독이 맡았다. 3명의 여직원을 공채했고, 홍콩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일하다가 중국의 압력으로 물러난 웡 아인링(Wong Ain-Ling)과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Tony Rayns)를 프로그램 어드바이저로 위촉했다. 스위스에 거주하는 임안자(현 전주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씨와 재미교포 임현옥 씨는 프로그램 컨설턴트로서 현지에서 영화선정을 돕도록 했다. 6월 초, 국제세미나에 연사로 참석했던 샌프란시스코 아시아·아메리카영화제 집행위원장 폴리(Paul Yi)씨도 나의 집요한 설득으로 우리와 함께 일한 후 영화제가 끝난 9월 말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칼럼니스트] 2008년 8월 25일 1461호 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3) |